고구마
'십! 구! 팔! 칠! ...' 아이들이 힘차게 달리다가 골목 사이로 쏙쏙 흩어졌다. 나는 친구와 함께 뛰면서 뒤를 흘끔거렸다. '삼! 이! 일! 땡! 잡는다!'하며 악쓰는 소리에 얼마 안 가 꼬마 도둑 두 명이 잡힌 듯했다. 나는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티코 자동차 뒤에 숨어 친구와 키득거렸다. 체육시간 100미터 달리기는 울상이 지어졌는데 도둑과 경찰 놀이는 어찌나 재밌는지 항상 땀 범벅에 먼지 덩어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도 길거리의 사람들을 피해서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크고 한적한 길이 나오면 친구 손을 잡고 냅다 달리는 것에 재미가 들었다. 마음은 콩닥거리지만 이제는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쁜 나이가 되어버렸다.
우리 동네는 삼미 슈퍼를 중심으로 사거리의 좁은 길 양쪽으로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래도 고만고만 한 높이라 조금만 고개를 올려도 하늘이 잘 보이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사는 4층짜리 빌라에는 또래 초등학생들이 대 여섯 명 살았다. 지하에 사는 동갑 선미와 남동생은 둘 다 하얗고 말라서 피구를 하는 날이면 제일 먼저 공을 맞았고 맞추는 쪽은 항상 1층의 선엽이와 누나였다. 성격이 활달했던 그 남매가 항상 애들을 불러 모으는 편이었기에 차 3대가 한 줄로 겨우 들어가는 빌라 앞 공간에 분필로 피구장을 그려놓곤 했다. 그러면 너도 나도 창문을 열고 '야! 뭐 하냐!' 한마디 내뱉고는 줄줄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빌라를 메웠다.
3층에 살던 나도 연년생인 남동생을 끌고 내려가 엎어라 뒤집어라 편을 나눴다. 그래도 내가 누나라고 항상 동생을 나쁘게 말하는 놈들이 있으면 큰소리를 내어 나는 무서운 누나라는 평을 받은 것 같다. 화가 나면 많이 괴팍해지던 게 이때부터였나? 하루는 동네 언니, 오빠들이 내리막길에서 3발 자전거를 앞뒤로 타며 내려오는데 나도 해보겠다며 도전을 외쳤더랬다. 하지만 엉성하게 뒤에 매달렸다가 엉덩이가 아스팔트에 다 까져서 혼자서 끙끙 마데카솔을 듬뿍 발랐던 따끔한 기억도 있다. 지금은 만들기 힘든 나름의 흑 역사도 있는 곳이 내 고향이다. 피구, 고무줄놀이, 꼬리 잡기, 한 발 뛰기, 도둑과 경찰 등 그 좁은 골목에서 할 수 있는 놀이라면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계속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 꽃~ '이라며 음악시간에 노래를 배웠지만 그곳은 나의 고향은 아니었다. 빌라가 가득하지만 도시라고 하기에는 애매했고 근처에 산, 논과 밭이 있었지만 산골이라 부르기에는 발끈하게 되는 애매함이 있었다. 친구들이 마당에 없는 날이면 큰아빠한테서 얻어온 486컴퓨터로 고인돌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주말에는 엄마와 밭에서 고구마를 캤고 또 초록색 옥상에서 된장을 담갔다. 아니 담그는 엄마 옆에서 코를 막으며 지켜봤다. 엄마와 밭에 갈 때면 어떤 게 아카시아 잎인지 고구마 잎사귀는 무슨 색인지 신기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일락도 우리 동네에 없었다면 그냥 향이 좋은 꽃 정도로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오락실, 초등학교 앞 분식집, 병아리 장수, 만득이 책도 사라졌고 이제는 편의점과 카페들이 그 자리를 메꿨다. 아이들은 편의점 전자레인지에 떡볶이를 데워먹고 카페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니 나의 고향은 이제 작은 도시가 되었다. 내 기억 속의 고향만이 도시도 산골도 아닌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산골과 시골에 살았던 엄마, 아빠에게나 중요한 줄 알았는데 다시 느끼거나 볼 수 없는 그리운 시간들을 모아 글로 쓰다 보니 나만의 단단하고 애틋한 덩어리가 되었다. 내 안에 숨어있던 고구마 덩이들을 발견했다.
2020.09~10
<공대생의 심야 서재>로 유명하신 이석현 작가님의 수업 <에세이 쓰는 시간>을 들으면서 썼던 에세이 과제들입니다.
주제 :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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